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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10억과 지금 10억이 가치가 다른건만, 나에게는 정말 머나먼 목표구나. 10억이라...
10억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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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코노미스트
지성진 JIS스튜디오 대표… 사진 찍기 위해 무보수로 일하며 감각 익혀
나폴레옹 힐의 저서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는 전세계적으로 2천만부 이상 팔려 성공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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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나폴레옹 힐은 성공하는 사람의 조건 중 하나로 ‘무보수로 기꺼이 일을 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꼽는다. 그가 이 조건을 제시한 까닭은 자신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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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풋내기 기자 시절 당대 최고의 갑부였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를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당신이 부자가 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카네기의 답은 간단했다. “지식이요.” 답변과 동시에 카네기는 나폴레옹에게 하나의 제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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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공한 비결을 가르쳐 줄테니 그걸 한 번 정리해 보는 게 어떻겠소?” 나폴레옹은 선뜻 오케이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당신은 그걸 무보수로 해야 하오. 무보수라도 괜찮겠소?” 나폴레옹은 당대 최고 거물의 제안인지라 엉겁결에 “예스”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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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거쳐 그가 쓴 책이 바로 성공학의 명저인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였다. 물론 그 책의 인세로 나폴레옹도 백만장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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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수로 기꺼이 일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은 나폴레옹 힐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는 많은 성공학 서적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이번 주 ‘10억을 모은 사람들’의 주인공 ‘지성진 포토샵’의 지성진(38) 대표는 나폴레옹의 주장에 딱 들어 맞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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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접고 포토하우스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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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5층 짜리 건물을 소유하고 외제 자동차를 굴리지만 그의 첫 사회 생활은 초라한 무보수로 시작했다. 건국대 농업경제학과 2학년 때 어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시자 더 이상 학교를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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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세일즈라도 할 요량으로 이력서를 썼지만 곧 찢어 버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취미삼아 해온 사진 관련 일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력이 없는 지대표가 구할 수 있는 직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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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단 부딪혀 보기로 마음 먹고 대한매일신문(옛 서울신문)에서 발행하는 한 잡지사를 무작정 찾았다. 86년의 일이다.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냥 쳐들어 갔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었거든요. 내셔널 지오그라픽 같은 유명 잡지에 제 사진이 실리는 게 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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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첫 일은 잡일을 하는 무급직이었다. 돈을 떠나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 하나 달랑 매고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88년 레닌그라드 아이스발레단이 내한공연차 왔어요. 회사에서 시킨 것도 아닌데 사진을 찍으러 갔죠. 편집장이 사진을 실어 주더군요. 한 마디로 하늘을 날 것 같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의 사진이 잡지에 실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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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쁨도 잠시,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사진만 잘 찍으면 좋은 잡지사로 스카웃될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또 자신의 사진이 데스크(최종 편집 책임자)에 의해 버려지는 것도 싫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독립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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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4년 1월 자신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8평 남짓의 ‘지성진 포토하우스’를 열었다. 독립하면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실컷 찍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당장 사진관을 유지하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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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1년 사진을 더 공부할 요량으로 경원전문대에 입학하며 대출받았던 학자금 2백만원만 남아 있었다. 너무 손님이 없어 한 명 있는 직원 얼굴 보기가 민망해 툭하면 가게 밖으로 나가 어슬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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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였다. 그래서 일단 잡지사들의 일을 하청받아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보물섬」「나나」「차밍 우먼」 등의 일거리를 맡았다. 잡지 일을 하면서 흑백사진 프린트(인화)도 같이 했다. “당시만 해도 흑백사진 프린트를 제대로 하는 곳이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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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트만큼은 자신이 있었거든요.” 장당 2천원씩 받고 1백장을 밤새워 프린트했다. 손에 떨어지는 돈은 월 20∼30만원 남짓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 그러자 서서히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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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처에서 먼저 단가를 5천원으로 올려주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단 자기네하고만 거래하자는 조건을 붙였다. 낮에는 잡지 사진을 찍고, 밤에는 집에서 프린트하는 일이 지대표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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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빌딩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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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웨딩이벤트 촬영 의뢰가 들어 왔다. 그에게는 첫 웨딩 사진 고객이었다. 고객은 목사였는데, 그 사진을 웨딩이벤트 회사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웨딩 박람회의 홍보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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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은 자신에게 있었지만 그는 내버려 뒀다. 자연스레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그 사진을 들고 각 예식장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찾아 다닌 곳만 해도 1백여곳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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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본격적으로 웨딩 사진을 찍게 된 것는 지난 94년 서울 신림동의 웨딩캐슬이란 예식장을 방문하면서부터다. “다른 예식장에서는 잡상인이라도 되는 양 건성으로 대했는데 그곳에선 예약실을 찾았더니 사진실로 내려가 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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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실로 내려가 자신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프린트가 너무 좋다며 매일 뽑을 수 있느냐고 물어 왔다. 그는 앞뒤 재지 않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예약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약실장은 “마이웨딩 잡지의 사진을 보니 당신 이름이 있던데 그 사람이 당신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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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좋아서 기자 이름을 보니 당신 이름이 있길래 확인하려고 전화했다”면서 “이것도 인연이니 한 번 같이 일해 보자”고 제안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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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보증금이었다. “예식장 사진을 찍으려면 보증금을 내야 합니다. 제가 보증금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존심도 허락하질 않았죠. 그래서 사진만큼은 자신 있느니, 보증금을 받지 말고 예식장에서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가라고 얘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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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을 하고 돈을 받았다. 1만원짜리 현찰 묶음이었다. 가방에 담아 오는데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차를 타고 오는데 이게 내 돈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차를 세운 뒤 누가 볼세라 차문도 잠그고 돈을 세어 봤죠. 그제서야 이게 내 돈이라는 걸 느꼈죠.” 그렇게 8년을 일하니 신사동의 5층짜리 빌딩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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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딩 매입은 지사장의 재산형성의 전환점이 됐다. 대출 4억원을 끼고 6억8천만원 주고 산 빌딩이 지금은 15억원이나 한다. 부동산값 상승세를 타고 2년 동안 배 이상 올랐다. 그는 이 빌딩의 리모델링에 3억8천만원을 투자해 스튜디오로 변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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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웨딩 사진 시장에서 성공한 비결을 묻자 지대표는 “사진은 금방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흑백 사진 프린트를 많이 했기 때문에 흑백사진에 강점을 갖고 있었거든요. 컬러 사진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흑백 사진은 별로 없거든요. 주특기를 살린 게 주효했죠”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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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장은 돈을 벌기 위해선 ‘일을 즐기라’고 말한다. 즐기지 않으면 고객들이 다시 찾아올 리 없기 때문이다. 주위에선 자신에게 고생을 많이 했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10년 동안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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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진은 좋은 날 찍는 거 아닙니까. 좋은 날 웃으면서 좋은 사진 찍었더니 돈이 따라 왔습니다. 직원들에게도 ‘즐겨라, 즐기면 고객들이 돈을 더 준다’고 늘 강조합니다.” 야외 촬영을 할 때 고객들 뒤로 사람들이 지나가도 그는 비켜달라는 말을 절대 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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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 싫은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 혼자 잘 찍는다고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모델인 고객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뒤에 사람들이 지나간다고 인상 쓰면서 비켜달라고 하면 모델들의 기분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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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사꾼이 되려면 프로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관을 하는 사람은 일단 사진을 잘 찍어야 한다는 것. 영업은 그 다음이다. “주위에서 저보고 영업을 잘 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거꾸로 알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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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있는 메뉴가 있는 식당이 장사가 잘 되는 것처럼 사진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잘 찍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객들이 다시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들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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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모습 보이면 고객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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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고객들이 다시 찾는다고 한다. “약혼식 사진을 저희 스튜디오에서 찍고 결혼식 사진은 다른 곳에서 찍은 고객이 있었습니다. 결혼식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희 사진관을 다시 찾아 왔더군요.” 이런 고객들은 반드시 다른 고객을 데리고 온다. 이렇게 10여년간 쌓인 고객이 있기에 그는 영업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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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객 리스트에는 유명인들도 많다. 마라톤의 이봉주 선수·전(前)법무부 장관 안동수 변호사·김두수 행정자치부 장관·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 등이 그의 고객이었다. 여수애양병원·남성패션 전문몰 와이셔츠넷·신흥정밀·KTB네트워크 홈페이지 등의 사진도 그까 찍은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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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장은 고객 중 가장 인상 깊은 인물로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꼽았다. 김장관의 저서인「남해 군수, 번지 점프를 하다」의 표지 사진을 찍었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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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사진값이 좀 비싸거든요. 김장관이 무슨 돈을 가지고 있겠어요? 만나서 얘기해 보니 사람이 너무 좋더군요. 그래서 돈은 필요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김장관이 자기가 나중에 좋은 자리에 가면 전화 한 통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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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정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김장관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런 전화 받으면 보람을 느끼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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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장은 내년이면 마흔이 된다. 혼자 사진 찍고 즐기며 살면 그만이지만 그러기엔 회사의 덩치가 너무 커졌다. 요즘 들어서는 문득 ‘초심(初心)’이 사라지는 게 두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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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지키면서 직원들의 경제적 자유를 뒷받침 하는 게 그의 고민꺼리다. 그는 사진관으론 드물게 건강보험 등 3대 사회보험을 직원들에게 모두 적용한다. 퇴직금도 근로기준법에 따라 준다. 일을 잘 하면 보너스도 준다. 사장 1인 위주의 주먹구구식 사진관과는 다른 경영방식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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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장은 지하 1층에만 있는 스튜디오를 건물 3, 4층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직원들을 독립시킨 후 자신의 스튜디오를 이용하게 할 작정이다. “제 일을 아웃소싱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직원들도 돈 걱정 하지 않고 좋아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직원들도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져야 좋은 사진을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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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장의 10억 만들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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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대학 중퇴하고 잡지사 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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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경원전문대 사진학과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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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서울 남가좌동 10평 짜리 빌라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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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지성진 포토하우스 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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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층 빌딩 6억8천만원에 매입(4억원 대출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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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8천만원 들여 리모델링, 현 시세 15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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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모은 사람들....사람을 잘 사귀는 것도 재테크
상도의 김상옥이 그랬죠..사업은"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거라고..3탄 올리겠습니다
음식맛은 ‘손맛’이란 얘기가 있다. 분명 똑같은 조리법대로 했는데도 초보주부의 음식맛은 어딘지 허전하기 십상이다. 투자에도 손맛이 있다.
같은 원칙과 공식을 따라해도 투자자마다 결과는 다르다. 투자시점과 배합의 그 미묘한 차이가 투자의 맛을 가른다. 김필수(가명)씨의 투자솜씨는 제대로 된 조리법에 손맛까지 얹은 품이다. 물론 실패를 통해 단련된 손맛이지만 말이다.
그는 대학 졸업 석달 전인 1990년 말 한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했다. 회사에 들어간 후부터 당시 월급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월 30여만원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그런데 그 용도가 좀 색달랐다. 결혼자금 마련이 아니라 ‘주식투자 자금’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주식에 관심이 많았던 실전 주식투자를 위해 월급으로 종잣돈을 모은 것이다. 돈 벌 욕심보다는 주식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출발점이었다.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덕에 자신이 모은 돈은 모두 주식투자에 쓸 수 있었다.
첫 투자로 모은 돈 다 날려
입사 이후 5년여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월급이 모이면 투자하고, 잃으면 또 월급을 모으는 일이 반복됐다. 매달 12만원씩 부어 3년만에 탄 재형저축 5백만원도, 월 18만원씩 역시 꼬박 3년을 모은 근로자증권저축도 증시가 삼켜버렸다.
그는 이 기간동안 “참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빚을 내서 투자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96년 5월 주가지수 선물, 97년 7월 옵션 거래시장이 개설되면서 그의 재테크 인생은 계기를 맞는다.
그는 선물시장이 개설된 96년 하반기 5백만원으로 선물거래에 뛰어든다. 1년 후 옵션거래도 개시했다. “새로운 투자라서 호기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죠. 원론 책을 보면서 1년여 독학을 했습니다.
틈틈이 관련 강좌도 다니고요. 잔재주보다는 주로 상품구조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때도 돈이 최우선 목적은 아니었어요. 워낙 금융투자에 관심이 많아 배워보고 싶었죠.”
그후 속칭 IMF시대로 불리는 경제위기 때 짭짤한 재미를 봤다. 증시 대세 하락기에는 투자자들도 손해볼 수밖에 없는 주식투자와는 달리 선물 옵션은 주가 하락기에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약 2년여만에 1억원을 벌어들였다.
그가 선물 옵션시장에서 한창 승승장구하던 98년 6월, 주가는 280선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는 ‘이 정도면 거의 바닥에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식시장으로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그 후 99년 6월 종합주가지수가 850선에 이르는 1년여 동안 또 다시 3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선물 옵션 투자도 일부 병행했다. 그가 선물 옵션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2000년부터였다.
“내 경우 선물 옵션으로 종잣돈을 모은 셈이죠. 그런데 선물 옵션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오랫동안 가져갈 투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산이 모인 다음에는 중단했죠.”
그는 투자 삼분법으로 불리는 주식·채권·부동산 전방위로 돈을 불렸다. 98년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수익률이 20%대를 넘었던 회사채 등 일부 채권 상품에 투자해서 짭짤한 재미를 봤다. 그가 아파트를 산 시기는 99년이었다.
그는 주식에는 전문가 수준이지만 부동산에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샐러리맨이 주식·부동산·채권을 모두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신 그에게는 친하게 지내는 부동산 전문가가 있다.
가끔씩 술 한잔하면서 자신은 금융정보, 상대방은 부동산 정보를 맞교환하곤 했다. 그가 아파트에 투자한 것도 그 친구의 조언 덕이었다. “지금 아파트값이 지나치게 떨어졌으니 무조건 사라고 하더군요.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라 거의 1백%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조언을 그대로 믿고 급매물로 나온 아파트를 한 채 샀죠."
사람을 잘 사귀는 것도 재테크
당시 매입가는 2억원. 전세를 끼고 샀기 때문에 실제 투자된 돈은 1억원을 조금 넘었다. 그 아파트의 시세가 지난해 4억원을 돌파했다. 아무래도 과열되는 느낌이었다. 정부에서도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고 각종 정책을 쏟아내는 판이니 부동산 시장도 상투에 왔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지난해 말 팔아치웠다. 매도가는 4억2천만원. 2배이상의 차익, 실제 투자금액을 기준으로 보면 4배 정도 수익을 본 셈이다.
그는 지금도 무주택자다. 지난 95년 결혼한 이후 죽 전세를 살고 있다. 아이가 학교 갈 때까지는 내집마련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좋은 기회만 있다면 ‘재테크’로서의 구입은 계속할 것이다. 다만 당분간은 부동산도 ‘내집마련’의 차원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투자처’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재테크로 승승장구한 그지만 정말 독특한 게 있다. ‘목표 수익률’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주식투자를 하든, 채권을 하든, 부동산을 하든 얼마 정도 수익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정하지 않는다.
“돈을 그냥 현금으로 들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투자를 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어떤 투자처가 가장 유리한가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금리가 더 높은가, 증시의 수익률이 더 높은가 하는 식으로 가장 합리적인 투자처를 비교해 보는 거죠. 사전에 얼마를 벌겠다는 식의 목표는 없습니다.”
그의 비교 기준은 금리와 주가의 ‘기대수익률’. 주식시장 기대수익률 계산법은 1을 예상 PER(주가수익률)로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올해 예상 PER(주가수익률)이 7∼8%, 즉 주가가 주당순익의 7∼8배 가격으로 거래될 전망이라고 치자.
1을 7∼8%로 나누면 13∼14%가 된다. 현재 예금금리는 대개 5% 내외. 그러니 당연히 주식시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그는 최근 주식투자 비중을 대폭 끌어올렸다. 현재 그의 포트폴리오는 주식 60%. 은행 금융상품의 이자율은 워낙 낮아 한푼도 투자하지 않는다. 대신 어음관련 상품에 20%를 넣어뒀다. 나머지 20%는 현재 살고 있는 전세금이다.
그는 증시에서 투자 종목을 선택할 때도 깐깐하게 조건을 따진다. 그가 정한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종목만을 엄선한다. 3대 조건 중 첫째는 이익이 나는 회사다. ‘잠재력’ 운운은 그의 앞에서는 헛소리다. 반드시 이익이 나는 회사여야 한다.
둘째, 배당을 주는 회사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금리 이상의 배당을 주는 회사에만 투자한다. 주식시장의 예상 수익률이 금리 이상이어야 주식투자를 결정하는 것처럼 개별 종목에서도 최소한 금리만큼의 수익은 보장돼야 움직인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1만원짜리 주식을 샀는데 5백원 배당을 준다면 연간 5% 금리의 금융상품에 투자한 만큼의 수익은 확보된 셈이다. 하지만 주가가 2만원을 뛰었는데 배당금을 5백원 준다면 김씨는 이 주식을 매각한다.
주가 대비 배당률이 2.5%로 줄어들어 금리보다 훨씬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최우량 종목으로 꼽히는 삼성전자 주식도 사지 않는다. 배당을 안 주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기준은 저평가된 주식이다. 그가 투자하는 종목 중 ‘첨단’이나 ‘성장’업종은 거의 없다. 대개 저성장 업종이다. 한마디로 미인주는 없고 남들이 잘 안 쳐다보는 박색주만 있다고 보면 맞다. 그는 이런 중소형 우량주를 오래 보유한다. 소위 가치투자다.
그는 이 원칙을 지킨 이후로 손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선물 옵션투자도 흔히 책에 나오는 상실적 수준의 원칙만 지키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쉽게 얘기하니 허탈하다”고 했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내를 갖고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시장상황이 바뀔 때마다 적절한 판단을 해야죠. 그건 어떻게 공식화할 수 없는 순간의 제 판단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관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점이죠.”
김필수씨의 10억 만들기 연보.
1990년 말 취직. 매월 30만원 이상 저축. 근로자증권저축 월 18만원, 재형저축 월 12만원씩 불입 시작.
92년 주식투자 시작. 원칙 없는 투자로 자금 거의 다 날림.
94년 적금으로 마련한 몫돈 1천여만원 주식투자로 날림.
96∼97년 5백만원의 자금으로 선물·옵션 투자 시작.
98년 종합주가지수 280선에서 주식투자 시작.
99년 선물·옵션 투자로 2년여만에 1억원 벌어들임. 채권투자 시작 (20∼30%의 수익률) 종합주가지수 850선에서 처분(3백∼4백% 수익률) 급매물 아파트 2억원에 매입.
2000년 총자산 5억원대로 불어남. 선물·옵션투자에서 완전히 손 뗌.
2001년 주가 400포인트대에서 주식투자 재개.
2002년 아파트 4억2천만원에 매각. 총 자산 9억원대로 불어남.
2003년 1월 현재 총 자산 약 10억원.
주식 평가액 약 6억원. 어음 약 2억원. 전세금 약 2억원.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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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아구찜 장사 최화자 ‘부산 아구’ 사장… “손님·거래처 가족처럼 믿어
글 이상건 기자 (sglee at econopia.com)
사진 김현동기자 ( nansa at joongang.co.kr)
“돈이요? 성실하게 일하면 저절로 벌리는 것 아닌가요?” 서울 신사동에서 ‘부산 아구’ 식당을 경영하
는 최화자(60) 사장은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는 질문에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재테크 전략도 간단했
다. “은행에 돈을 넣어두고 찾지 않는 게 가장 기본입니다. 넣어야 돈이 불어나지 갖다 쓰는데 어떻게 돈
이 불어날 수 있어요? 일단 저축부터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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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돈은 따라오는 것이지 좇는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붙
는 게 돈이라는 것. 그의 재산을 만들어준 존재는 다름 아닌 손님들이다. 그는 장사를 하면서 몇 가지 신조
가 있다. 장사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가게 앞에서 절대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다. “고객에게 우리 집으
로 와 달라고 투정을 부려서는 안 되요. 그러나 일단 들어온 손님에겐 최선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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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재료 안 쓰면 손님 등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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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사장의 판매전략은 ‘박리다매’다. 그는 이익을 많이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좋은 물건을 친절하게
판다’는 게 신조다. 좋은 식자재가 들어오지 않으면 퇴짜를 놓는다. “내 자식이 먹는다고 생각하면 음식
을 대충 만들거나 시원찮은 재료를 쓸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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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자재를 공급하는 사람도 그와 한두 해 거래를 한 것이 아니다. 까다롭지만 일단 믿으면 그 사람하고만 거
래한다. 조금 싸다고 거래처를 바꾸는 건 자신의 성격과 맞질 않는다고 한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절
대 의심하지 않는다. 최 사장은 돈 관리도 직원들에게 맡긴다. “믿고 맡기지 않으면 어떻게 일을 해요?
피곤하잖아요. 믿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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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받아놓고 돈 늦게 주는 것도 딱 질색이다. 거래처에 줄 돈을 내 돈보다 먼저 챙긴다.“ 사실 아구찜이
나 꽃게는 싼 음식이 아니거든요. 술 한잔에 아구찜 하나 먹으면 적어도 2만5천원입니다. 좋은 재료를 쓰
지 않으면 손님들이 등을 돌리거든요. 날짜 맞춰 돈을 줘야 좋은 재료를 갖다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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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장은 손님을 가족처럼 여긴다. “사업 목적으로만 장사를 했다면 20년 동안 장사를 못했을 겁니다. 손
님들이 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죠. 그러면 손님도 좋고 저도 좋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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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 중엔 10년이 넘는 단골들이 많다.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학생이었던 고객들이 지금도 ‘부산 아
구’를 찾는다. 손님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도 가족적이다. 장모, 이모, 엄마 등. 20년 전 대학생이었던 한
고객은 가족과 함께 식사한 뒤 “이모가 우리 가족보다 나를 더 많이 알아요”라고 말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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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게에는 유명인 단골들도 많다. 연예인 중에서는 최진실, 김민종, 유동근, 신구, 이영자, 조혜련 등
이 식당을 자주 찾는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인 이민성과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도 단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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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축구선수인 안정환은 그를 ‘엄마’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부산 아구’에는 연예인 사인이나 사진
하나 없다. 통상 식당들은 유명인들이 오면 그들의 사인이나 사진을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최사장은 그
런 데 아예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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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 똑같은 손님인데 연예인이 왔다고 호들갑 떨고 그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누가 오던 그냥
가족처럼 대하면 되는 것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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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는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아들이 왔다고 한다. 지금도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손님
이 그러더라고요. 정주영 회장 아들이 왔다고···. 그래서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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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경기도 용인에 사놓은 땅도 손님을 통해서 샀다. “손님 중에 한 분이 매일 개미같이 일만 하지 말
고 재테크 차원에서 땅을 사라고 자꾸 권하더군요. 장사하기 바쁜데 언제 땅을 사러다닐 시간이 있겠어요.
손님이 권하는 데로 그냥 따라했죠.” 최 사장은 이렇듯 장사도 투자도 모두 시작은 손님에게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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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타지 않은 음식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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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베테랑 장사꾼(?)이지만 장사를 하기 전까지 최 사장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지난 70년 경기도 의
정부에서 달랑 몸만 들고 서울로 왔다. 차비 외엔 10원 한 장 없었다. 상경 2년 만에 서울 돈암동에 15평짜
리 자그마한 연립주택 한 채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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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중동 개발붐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생한 결과였다. 살림만 하다보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어
려서부터 대가족 살림을 도맡아했던 최 사장은 음식 장사를 하면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장사
를 하겠다고 결심은 했는데 문제는 아이템이었다. 어떤 아이템으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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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모조모 머리를 굴렸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장사가 잘 되는 가게를 몇몇 군데 돌아다녔다. 아
구찜을 보는 순간, 괜찮겠다 싶었다. 아구찜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계절을 타지 않는 음식이었기 때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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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회는 계절을 타고 고기는 많이 먹으면 금세 질리거든요. 아구찜은 일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게 마음에 들었죠. 계절 타는 장사는 하기 힘들어요.” 아구 얘기가 나오자 그의 입에선 아구 예찬론이 흘
러나왔다. “수심이 깊은 곳에 사는 아구는 간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는 음식이거든요. 아구찜으로 안주를
하면 아침에 숙취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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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시작한 시기는 지난 83년. 그는 20년 동안 한자리에서 아구찜 장사를 했다.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옮
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장사 잘 된다고 장소 옮기고 그러면 안 돼요. 손님들이 헷갈려 하잖아
요. 한자리에서 오래오래 일해야 손님들이 쉽게 오는 법이거든요.” 장사를 해서 번 돈은 꼬박꼬박 은행에
갖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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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하다보면 힘든 일이 있겠다 싶었지만 힘든 적이 별로 없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즐겁게 일했다고
한다. “굳이 힘들었던 일을 꼽으라면 심야영업 단속할 때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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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동 아구찜 가게들은 밤새 장사를 하는데, 심야영업 단속을 하니 마음대로 장사를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도 그는 벌금을 물어가면서 장사를 했다. 자기를 보고 오는 손님들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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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사장은 장사에 관해서는 일본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 사람들이 가업을 이어 장사를 하는
걸 보면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없다고 한다. “장사는 하루이틀 하다 마는 게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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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급해요. 너무 빨리 승부를 보려고 하죠.” 그는 자식들이 아구찜 장사를 하겠다면
말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식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첫째는 변호사고 둘째는 연극 공부를 위
해 유학 중이다. 막내는 의대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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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얘기한 적이 없어요. 장사를 하고 싶으면 하고 다른 걸 하고 싶으면 하라
고 했죠.” 주위에서 장사도 잘 되고 자식 농사도 잘 지었으니 부러울 것 없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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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차곡차곡 모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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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사장은 장사로 돈을 벌려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돈 좀 번다고 그 돈으로 주식 투자하
고 부동산 투자하면 장사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식이나 부동산보다 고객을 쳐다봐야지 쓸데없
이 그런데 기웃거리면 장사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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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8년에 마련한 서울 역삼동 45평의 아파트 값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주위에서 저보고 좋은 집
에 산다고 하는데 저는 돈 따지지 말라고 그래요. 집 하나에 7억∼8억 원 하는 게 뭐 대수입니까. 장사하
는 사람들은 그냥 열심히 좋은 물건 만들어 고객들에게 팔면 그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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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복권을 사는 사람들도 최 사장은 이해하지 못한다. 설사 당첨돼 돈을 벌더라도 관리가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돈은 차곡차곡 모아야 하는 겁니다. 한번에 너무 큰 돈이 들어오면,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똥오줌 못 가리게 되요. 환갑이 다 되서 보니 역시 세상은 순리대로 살아야 돈이 따라오는 거 같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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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사장은 장사로 성공하려면 먼저 체면을 버리라고 말한다. 대기업에 있다가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 중
에 체면을 생각해서 크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망한다는 게 최사장의 얘기.
“경험 없이 체면 차리려고 크게 시작하면 다 망해요. 주위에서 퇴직금 날린 사람들 숱하게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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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 하나 팔더라도 먼저 장사 경험부터 쌓아야죠.” 작게 시작해서 경험을 쌓고 자신감이 생길 때 판을 키
우라는 충고다. “장사라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집세도 내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해요. 저도 지난해 부가세
를 2천7백만 원 냈거든요. 이런 걸 다 따져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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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들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손가락질 받을 짓을 절대 하지 말라고 최 사장은 주장한다. 장사는 고객들의
신뢰 없이는 절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 딸이 제일제당에 입사시험을 봤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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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중에 제일제당 직원들이 많았는데 입사원서를 냈다고 하니 얘기를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남에게 의지하는 습관이 들면 제대로 인생을 살아나갈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반듯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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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는 사이라고 부탁하면 결국에 가서는 고객들하고 사이가 멀어지거든요.” 자식들은 밤새 장사로 고
생하는 그에게 이젠 쉬라고 말하지만 최 사장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장사를 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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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있고 먹고살 만큼 돈도 모았지만 일하는 게 가장 즐겁다고 한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해요. 열심
히 일하면 그만큼 보상이 돌아오거든요. 돈 좀 있다고 놀고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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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사장은 인터뷰 중에도 가게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들어오세요”, “어서오세요”라는 인사를 쉬지 않
았다. 평생을 저렇게 살아왔겠다 싶었다.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그에게서 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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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자 사장의 10억 만들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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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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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서울 돈암동에 18평 빌라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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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신사동에서 ‘부산 아구’ 식당 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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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역삼동 45평 아파트 매입(시가 7억원).경기도 용인 땅 5억원에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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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은행에 현금자산 5억원가량
-”(이코노미스트)
5.
세이노님의 말씀대로 돈이 기회를 주는게 아니죠?
무엇이 기회를 줄까요?
그돈을 움직일수 있는 지식이죠..자기계발 게을리 하지 맙시다!!!!
전직 은행원 이상기씨의 재테크 공부법
글 노혜령 본지 객원기자 (geekporter at hanmail.net)
금융권 출신인 이상기(가명. 40)씨. 상고 출신인 그는 10억원 이상의 자산가다. 책 읽고 공부하는 게 취미
지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곧장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정 형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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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물려 받은 재산은 있을 턱이 없다. 그가 10억을 모으는데 삼은 밑천은 ‘읽고 예측해 타이밍을 잡
는 취미’다. 한 마디로 ‘지식’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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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5개 이상 신문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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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하루에 5개 이상의 신문을 읽는다. “종합지 3개에 경제지 2개는 필수죠. 여기에 경제주간지와 부동
산 전문지도 꼭 보구요. IT붐이 일기 훨씬 전인 1994년께부터 전자신문도 구독했습니다. 전산 관련 부서에
서 일할 때부터 들인 버릇이죠. 그렇게 4∼5년을 했더니 뭔가 트렌드를 보는 눈이 생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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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현재라면 책은 미래다. 그는 신문과 책 읽기를 병행한다. 그가 구입하는 책은 연간 1백여권. 이 가
운데 30∼40권은 정독하고 나머지는 통독한다. 신문에서 얻은 현실의 단편적 지식을 책을 통해 종합 정리하
고 큰 줄기를 잡는 것이다. 이런 식의 버릇을 들인지가 10여년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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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습관이 당장 돈을 벌어다 준 것은 아니다. 그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경영학)에 대학원(경
제학)까지 마치느라 본격적인 재테크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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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근무라는 점을 활용해 빚을 내서 주식투자도 해 봤지만 돈만 날렸다. 증권업계 직원들의 말에 너무
의존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17년이 된 99년까지도 ‘대출 낀’ 수도권 1억7천만원짜리
아파트 한 채가 그의 전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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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잘 쓰기 위해 번다”는 철학을 가진 그는 마냥 허리띠를 졸라매는 저축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
던 그가 본격적인 나선 것은 99년 초였다. 그해는 이씨에게 여러면에서 잊을 수 없는 해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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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터지고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중소기업 육성이니 벤처기업 지원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신문 등 정보를 보면서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정부가 적극적인 중소기업 지원과 벤처 육성책
을 쓸 수 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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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99년 1월 추가 대출을 받았다. 유망 벤처 종목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그래픽(VGA)카드를 만드는
가산전자(현 M플러스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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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산관련 업무를 보다가 가산전자를 알게 됐죠. 매일 컴퓨터를 만지다보니 그래픽 카드 시장이 크
게 성장하리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있었지만 대만업체에 지지 않을 만한 경쟁력을 갖춘 회사
는 가산전자 정도였어요. 그때 주가는 2백∼3백원 수준이었죠. 이건 확실히 된다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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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출 받은 2천만원으로 이 회사 주식을 샀다. 가산전자 주가는 99년 말 1만원 대를 뛰어넘어 최고 1만
4천원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씨가 매각으로 실현한 이익은 약 2억여원. 2000∼2001년에 걸쳐 주
당 2천5백∼3천원 수준일 때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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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수익률 10배를 넘는 대박이었다. 99년 하반기 그는 장외시장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통신관련 종목들
에 총 5천만원을 투자했다. 이듬해 7월과 8월에 걸쳐 회수한 액수는 총 6억여원. 약 11배 이상 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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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집부터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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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그해 말 퇴사를 결심한다. 좀더 본격적으로 벤처 붐 타기를 위해서 였다. 그는 코스닥 등록을 준비
하는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무담당 최고책임자(CFO)를 맡았다. 구조조정과 투자 유치가 그
의 주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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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은 별로 높지 않지만 스톡옵션을 받아 짤짤한 재미를 봤다. 1년여 지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그
는 컨설팅 업체를 차리고 본격적인 ‘중소기업 주치의’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비용은 대부분 스톡
옵션으로 대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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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컨설팅을 ‘일’이자 ‘투자’로 활용하고 있다. 내실 있는 중소 업체를 발굴해 재포장한 뒤 투자를
유치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컨설팅 대가로 스톡옵션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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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 대상 업체를 고를 때 보는 기준은 첫째 2∼3년 후 떠오를 업종, 둘째 자질 있는 CEO가 경영하는 기
업, 셋째 시장이 너무 급변하지 않는 업종이다. 지난 2년여 동안 그가 컨설팅한 중소기업은 6개. 이가운데
코스닥에 등록시킨 업체도 2곳이다. 그는 재테크에서 꼭 강조하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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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금리가 오르면 인플레가 실물자산에 반영된다. 또 금리
가 낮으면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려서 집값이 오른다. 장기적으로 보면 집값은 어떤 경우에도 오르게
돼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그는 꼭 집을 사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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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파트 평수를 늘려 서울에 입성한 시기도 기가 막혔다. 집값이 들썩이던 초기 2002년 1월이었다. 사
실 그 무렵 집값 상승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2001년 세계경기 동반 침체로 수출이 막히면서 정부는
내수 진작책을 쏟아냈다. 과열된 소비는 문제를 낳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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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1년 말 전세값 상승에 주목했다. 대개 32평형 이상의 전세값이 집값의 60%를 넘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집값 상승의 전주곡이었다. 이씨는 3억원에 43평형 아파트를 매입했다. 현재 시가는 3억9천만원정
도다. 9천만원 정도의 차익을 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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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곳엔 손 안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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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달러 환율 1천1백60원대에 달러를 사들여 1천3백원대에서 매각했다. 총 2억원정도 였다. 덕분에
약 12%, 1천2백만원정도의 수익을 올렸다. 골프 회원권도 이씨가 애용하는 투자대상. 최근에는 지난 2000
년 11월에 매입해서 이듬해 5월에 매각하면서 약 3천만원의 차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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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귀뜸한 골프회원권 투자법은 이렇다. 대개 11월부터는 골프 회원권 시장도 동면이 들어간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이 떨어지게 돼 있다. 이때 구입하면 싸게 살 수 있다. 반면 성수기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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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4월쯤 되면 골프회원권 시장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파란 잔디가 돋아나면 ‘나도 골프회원권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게 마련. 그래서 수요가 늘어난다. 이때 내다 팔면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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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환율·부동산·골프회원권 등은 현실투자, 즉 단기운용에 속한다고 말한다. 반면 벤처투자는 2∼3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투자다. 그가 주로 투자하는 벤처 업체는 미래형 산업. IT업종과 엔터테인먼트 업체로
제한돼 있다. 소프트웨어 업종 역시 투자수익률은 높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하지 않는다. 제대로
아는 업종 2∼3종목에만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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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낡은 ‘아이디어 북’이 있다. 10여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그 노트에는 온갖 아이디어가 다 적혀
있다. 트렌드를 예측한 메모에서 경제분석 노트, 책을 읽고 난 후의 독후감, 나이대 별로 해야 할 일을 그
린 그래프,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까지 꿴 10여년을 하루 5시간 이상씩 읽고 생각하고 분석한 흔적이다. 10
억원은 절대로 그냥 벌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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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씨의 10억 만들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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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취직. 수입의 10%는 책 구입 등 자기개발에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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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분당 32평형 아파트 2억원에 매입 (1억원 은행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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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주식투자로 3천만원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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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 IMF여파로 이자 감당 못해 분당 아파트 1억6천만원에 매각. 4천만원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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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 가산전자 주식에 2천만원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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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시장에서 서두인칩등 IT관련주 매입. 중소기업 CFO로 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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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산전자 매각으로 2억원 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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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인칩 등 장외시장 투자주식으로 6억원 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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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소기업 컨설팅 본격적으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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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업체 구조조정 및 자금조달 컨설팅 수주. 일부 스톡옵션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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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개 업체 코스닥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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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업체 컨설팅 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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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43평형 아파트 1채, 73평형 빌라 1채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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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현재?총 자산 약 13 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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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약 1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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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회원권 약 1억1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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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43평형) 약 3억9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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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73평형) 약 7억원
-이코노미스트
6.
[10억을 모은 사람들]“8개월 공부해 경매 성공률 100%”
이문수 솔로몬 상호저축은행 지점장…돈 버는 공부하는 데 투자 아끼지 말아야
사진 김현동기자 ( nansa@joongang.co.kr)
글 노혜령 객원기자 (geekporter@hanmail.net)
이문수(38) 솔로몬 상호저축 은행 테헤란로 지점장은 돈에 관한 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았다. 부자집 아들→기울어진 가세→주식투자 성공→보증으로 빚더미→총 자산 10억원 축적. 이 리스크의 굽이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을 발휘했다. 냉정한 판단력과 결단력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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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이 돈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것 같아요. 강원도에서 큰 목장을 하는 부자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중학교 시절 부친께서 앓아 누우시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죠. 그때 어렵게 살면서 돈에 대한 절제를 체득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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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력이 투자성공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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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주식투자 스토리는 그의 남다른 절제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그는 대학 4학년 경제학 강의시간에 했던 모의 주식투자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모험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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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금을 빼서 주식투자에 뛰어든 것. 당시 전세 6백만원짜리 자양동 반지하에 살던 그는 집 주인을 설득해 전세를 보증금 1백만원에 월세 10만원 계약으로 돌렸다. 그리고 전세금 5백만원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 주식 활황세의 끝물이던 1989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돈을 5개월 만에 4천만원으로 불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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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여느 주식투자 성공 에피소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돋보이는 점은 그 다음부터다. 이 지점장은 마음속으로 이 4천만원에 ‘결혼 자금’이란 꼬리표를 달아 은행에 넣어뒀다. 그리고 주식에서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 ‘5개월 만에 7백%의 수익’이란 강렬한 중독성 투자를 경험한 20대 젊은이로선 좀처럼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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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돈은 결혼 때 전세 자금 밑천이 됐고, 현재 10억원에 달하는 자산의 종잣돈이 됐다. 자리를 잡아가던 그를 또 한번 끌어내린 사건이 ‘빚 보증’이었다. 첫 직장 동부화재에서 절친한 선배 2명에게 빚 보증을 섰다가 총 4천5백만원의 채무를 떠안게 된 것. 이지점장은 99년 회사를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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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으로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가 받은 퇴직금은 2천만원. 여기에 아내 몰래 빼낸 전세금 2천만원을 얹었다. 8천만원 아파트 전세금을 6천만원 보증금에 월세 50만원으로 바꾼 것. 그리고 주택금융 전문회사인 뉴스테이트 캐피탈로 옮겼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새벽 1∼2시에 퇴근할 정도로 열성적인 영업 덕에 인센티브를 포함한 그의 연봉은 1억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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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아파트 주인은 전세금 원상복귀를 요청해 왔다. 그는 아예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2000년 11월, 가락동에 24평형 아파트를 1억2천만원에 샀다. 가진 돈이 6천만원이었으니 나머지 6천만원은 대출을 받았다. 이 아파트 시세는 현재 2억5천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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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동산 경매에 취미를 붙이면서 본격적인 돈 불리기에 들어간 것도 이 때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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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보증으로 돈에 몰리면서 재테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만으로는 1∼2억원 모으기도 얼마나 힘듭니까. 부업을 하지 않고는 돈을 모은다는 게 어렵죠.당시 주식투자로 거액을 날려 빚더미에 앉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살 결심까지 했을 정도였죠. 우리는 의기 투합해 돈 벌 궁리를 했죠.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경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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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에 60만원짜리 경매 강의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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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택금융 업체인 뉴 스테이트에 다녔던 이 지점장으로서는 직장 일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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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매를 배우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서점에서 경매 관련 책을 사서 읽는 것으로 워밍업을 했다. 그 후 1주일에 60만원짜리 거액의 경매 강의(건국대)도 듣고 부동산 금융 전문가 과정(한국생산성본부)도 1백시간 이상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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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법원 경매 담당자에게 개인적인 사사까지 받았다. 그가 경매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실전에 돌입하기까지 들인 시간은 약 7∼8개월. “법원과 각종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뒤져 본 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주말을 이용해 물건을 확인하러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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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에게 2002년 하반기에 기회가 왔다. 강원도 횡성 근처에 경매 매물로 나온 밭 9천7백평을 낙찰받은 것이다. 감정가만도 1억6천만원이었지만 거듭 유찰된 결과 7천6백만원에 사들였다. 현재 이 땅의 시가는 7억∼8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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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1백10㎞, 스키 리조트인 피닉스 파크에서 30분, 성우 리조트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어요. 주변에 냇가도 있고…. 몇 년 동안 버려져 묵은 밭으로 전락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지, 위치로 보나 주변 환경으로 보나 잠재력이 큰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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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땅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준비 덕이었다. 그는 뉴 스테이트 시절 20일간의 미국 출장 기회를 이용해 현지 팬션을 스터디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강원도 횡성에 있는 통나무 학교의 과정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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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라나 나무 베고 자르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부터 팬션 사업을 염두에 두고 고른 땅이었다.앞서 2002년 1월에는 원주에 12평짜리 아파트를 1천9백만원에 경매로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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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백만원을 들여 수리한 뒤 월세 27만원을 받고 있다. 이 아파트의 현재 시가는 3천만원. 하지만 미래가치는 훨씬 높다. 지난 85년에 지은 저층 아파트에 대지지분이 14평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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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파트의 앞길은 정해져 있다. ‘재개발’이다. 이 지점장은 살 때부터 이 점을 노렸고 예상대로 최근 재개발 허가가 떨어졌다. 추가비를 일정액 부담하면 28평형 아파트를 받게 된다. 주변 28평형 아파트의 시세는 7천만∼8천만원을 호가한다. 같은 해 3월에는 군시설지를 공매를 통해 4백만원에 샀다. 집안 어른들의 묘자리를 염두에 둔 구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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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줄잡아 하루 50∼60명씩 고객을 만난다. 그러다 보니 얼굴만 보면 돈을 빌리러 오는 것인지, 갚으러 오는 것인지, 신용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눈치챌 정도가 됐다. 은행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표정과 차림새를 보면 대출 여부가 70∼80%는 가늠이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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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하러 와서 금리가 높다며 깎아 달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가족들이 모두 핸드폰을 갖고 있는지부터 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죠. ‘직장에 다니는 한 사람만 빼 놓고 모두 해지하십시오. 휴대폰 4대면 한 달에 30∼40만원 사용료가 나옵니다. 그 돈으로 이자를 내고, 적금을 부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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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핵심은 내버려둔 채 엉뚱한 길을 찾는 것”이 돈 관리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 진단한다. “머리가 가려운데 엉덩이를 긁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핵심을 짚어 돌파하면 갈 길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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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점장은 앞으로 3년 정도 직장생활을 더 할 작정이다. 그 후에는 강원도 땅에 내려가 본격적인 팬션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 전까지는 저축은행의 격전지 테헤란로에서 솔로몬을 업계 리더로 올려 놓는데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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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45세 이전에는 직장생활을 청산할 겁니다. 45세가 넘으면 정열을 잃고 생각이 굳어지기 쉽기 때문이죠. 내 사업을 해서 10년 안에 1백억원을 모으는 것, 이게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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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수 지점장의 10억 만들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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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대학 4학년 때 전세 보증금 5백만원으로 주식투자. 4천만원으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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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동부그룹 입사. 월급의 60∼70% 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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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빚 보증으로 4천5백만원 부채 떠안음. 퇴직금과 일부 전세금으로 부채 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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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억2천만원짜리 가락동 아파트 매입(대출 6천만원). 현재 시가 2억5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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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원주에 12평짜리 아파트 1천9백만원에 경매로 매입. 현재 시가 3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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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시설지 430평 공매 통해 4백만원에 매입. 현재 시가 1천5백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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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 9천7백평 밭 7천6백만원에 경매로 매입. 현재 시가 7억∼8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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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수(38) 솔로몬 상호저축 은행 테헤란로 지점장은 돈에 관한 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았다. 부자집 아들→기울어진 가세→주식투자 성공→보증으로 빚더미→총 자산 10억원 축적. 이 리스크의 굽이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을 발휘했다. 냉정한 판단력과 결단력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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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이 돈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것 같아요. 강원도에서 큰 목장을 하는 부자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중학교 시절 부친께서 앓아 누우시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죠. 그때 어렵게 살면서 돈에 대한 절제를 체득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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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력이 투자성공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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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주식투자 스토리는 그의 남다른 절제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그는 대학 4학년 경제학 강의시간에 했던 모의 주식투자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모험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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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금을 빼서 주식투자에 뛰어든 것. 당시 전세 6백만원짜리 자양동 반지하에 살던 그는 집 주인을 설득해 전세를 보증금 1백만원에 월세 10만원 계약으로 돌렸다. 그리고 전세금 5백만원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 주식 활황세의 끝물이던 1989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돈을 5개월 만에 4천만원으로 불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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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여느 주식투자 성공 에피소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돋보이는 점은 그 다음부터다. 이 지점장은 마음속으로 이 4천만원에 ‘결혼 자금’이란 꼬리표를 달아 은행에 넣어뒀다. 그리고 주식에서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 ‘5개월 만에 7백%의 수익’이란 강렬한 중독성 투자를 경험한 20대 젊은이로선 좀처럼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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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돈은 결혼 때 전세 자금 밑천이 됐고, 현재 10억원에 달하는 자산의 종잣돈이 됐다. 자리를 잡아가던 그를 또 한번 끌어내린 사건이 ‘빚 보증’이었다. 첫 직장 동부화재에서 절친한 선배 2명에게 빚 보증을 섰다가 총 4천5백만원의 채무를 떠안게 된 것. 이지점장은 99년 회사를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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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으로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가 받은 퇴직금은 2천만원. 여기에 아내 몰래 빼낸 전세금 2천만원을 얹었다. 8천만원 아파트 전세금을 6천만원 보증금에 월세 50만원으로 바꾼 것. 그리고 주택금융 전문회사인 뉴스테이트 캐피탈로 옮겼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새벽 1∼2시에 퇴근할 정도로 열성적인 영업 덕에 인센티브를 포함한 그의 연봉은 1억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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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아파트 주인은 전세금 원상복귀를 요청해 왔다. 그는 아예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2000년 11월, 가락동에 24평형 아파트를 1억2천만원에 샀다. 가진 돈이 6천만원이었으니 나머지 6천만원은 대출을 받았다. 이 아파트 시세는 현재 2억5천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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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동산 경매에 취미를 붙이면서 본격적인 돈 불리기에 들어간 것도 이 때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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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보증으로 돈에 몰리면서 재테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만으로는 1∼2억원 모으기도 얼마나 힘듭니까. 부업을 하지 않고는 돈을 모은다는 게 어렵죠.당시 주식투자로 거액을 날려 빚더미에 앉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살 결심까지 했을 정도였죠. 우리는 의기 투합해 돈 벌 궁리를 했죠.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경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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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에 60만원짜리 경매 강의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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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택금융 업체인 뉴 스테이트에 다녔던 이 지점장으로서는 직장 일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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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매를 배우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서점에서 경매 관련 책을 사서 읽는 것으로 워밍업을 했다. 그 후 1주일에 60만원짜리 거액의 경매 강의(건국대)도 듣고 부동산 금융 전문가 과정(한국생산성본부)도 1백시간 이상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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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법원 경매 담당자에게 개인적인 사사까지 받았다. 그가 경매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실전에 돌입하기까지 들인 시간은 약 7∼8개월. “법원과 각종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뒤져 본 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주말을 이용해 물건을 확인하러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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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에게 2002년 하반기에 기회가 왔다. 강원도 횡성 근처에 경매 매물로 나온 밭 9천7백평을 낙찰받은 것이다. 감정가만도 1억6천만원이었지만 거듭 유찰된 결과 7천6백만원에 사들였다. 현재 이 땅의 시가는 7억∼8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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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1백10㎞, 스키 리조트인 피닉스 파크에서 30분, 성우 리조트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어요. 주변에 냇가도 있고…. 몇 년 동안 버려져 묵은 밭으로 전락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지, 위치로 보나 주변 환경으로 보나 잠재력이 큰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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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땅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준비 덕이었다. 그는 뉴 스테이트 시절 20일간의 미국 출장 기회를 이용해 현지 팬션을 스터디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강원도 횡성에 있는 통나무 학교의 과정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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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라나 나무 베고 자르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부터 팬션 사업을 염두에 두고 고른 땅이었다.앞서 2002년 1월에는 원주에 12평짜리 아파트를 1천9백만원에 경매로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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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백만원을 들여 수리한 뒤 월세 27만원을 받고 있다. 이 아파트의 현재 시가는 3천만원. 하지만 미래가치는 훨씬 높다. 지난 85년에 지은 저층 아파트에 대지지분이 14평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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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파트의 앞길은 정해져 있다. ‘재개발’이다. 이 지점장은 살 때부터 이 점을 노렸고 예상대로 최근 재개발 허가가 떨어졌다. 추가비를 일정액 부담하면 28평형 아파트를 받게 된다. 주변 28평형 아파트의 시세는 7천만∼8천만원을 호가한다. 같은 해 3월에는 군시설지를 공매를 통해 4백만원에 샀다. 집안 어른들의 묘자리를 염두에 둔 구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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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줄잡아 하루 50∼60명씩 고객을 만난다. 그러다 보니 얼굴만 보면 돈을 빌리러 오는 것인지, 갚으러 오는 것인지, 신용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눈치챌 정도가 됐다. 은행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표정과 차림새를 보면 대출 여부가 70∼80%는 가늠이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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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하러 와서 금리가 높다며 깎아 달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가족들이 모두 핸드폰을 갖고 있는지부터 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죠. ‘직장에 다니는 한 사람만 빼 놓고 모두 해지하십시오. 휴대폰 4대면 한 달에 30∼40만원 사용료가 나옵니다. 그 돈으로 이자를 내고, 적금을 부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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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핵심은 내버려둔 채 엉뚱한 길을 찾는 것”이 돈 관리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 진단한다. “머리가 가려운데 엉덩이를 긁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핵심을 짚어 돌파하면 갈 길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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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점장은 앞으로 3년 정도 직장생활을 더 할 작정이다. 그 후에는 강원도 땅에 내려가 본격적인 팬션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 전까지는 저축은행의 격전지 테헤란로에서 솔로몬을 업계 리더로 올려 놓는데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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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45세 이전에는 직장생활을 청산할 겁니다. 45세가 넘으면 정열을 잃고 생각이 굳어지기 쉽기 때문이죠. 내 사업을 해서 10년 안에 1백억원을 모으는 것, 이게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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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수 지점장의 10억 만들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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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대학 4학년 때 전세 보증금 5백만원으로 주식투자. 4천만원으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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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동부그룹 입사. 월급의 60∼70% 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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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빚 보증으로 4천5백만원 부채 떠안음. 퇴직금과 일부 전세금으로 부채 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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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억2천만원짜리 가락동 아파트 매입(대출 6천만원). 현재 시가 2억5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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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원주에 12평짜리 아파트 1천9백만원에 경매로 매입. 현재 시가 3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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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시설지 430평 공매 통해 4백만원에 매입. 현재 시가 1천5백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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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 9천7백평 밭 7천6백만원에 경매로 매입. 현재 시가 7억∼8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