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밌는 글이네. 국부 이승만 십색기.
2.
육이오 전쟁의 승패를 가른 토지 개혁
육이오 전쟁을 도발한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한 달이면 남한을 완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해방 이후 남한 내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들끓었다. 당시 북한은 지주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여 소작인들에게 무상 분배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서른세 살에 불과한 청년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토지 개혁이다. 소작인 생활로 입에 풀칠하던 농노 68만 가구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농토가 생긴 것이다. 김일성이 들어오면서 꿈에 그리던 전답이 4,500평이 생겼으니 김일성이 가짜든 진짜든, 젊었든 늙었든 따질 바가 아니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그가 주장하던 소위 통일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소작인 68만 가구를 충성심 강한 전사로 끌어들이면 통일의 결실을 맺게 되리라고 확신했던 듯하다.
남한의 농민들, 특히 소작인들은 북한의 이러한 소식을 듣고 공산주의라는 게 저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고 김일성의 북한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김일성이 ‘내려가기만 하면 남한 인민들이 다 환호할 것’이라고 믿은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남한은 지주, 재벌, 친일 고급 관료들이 모여 한민당을 결성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면서 통치 대리인을 두었는데, 이들이 바로 지주들이요 친일 고급 관료들이었다. 이러한 한민당의 정점에 이승만 세력이 있었고, 더 위에 군정이 있었다.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삼아 자신들의 방패와 방죽으로 삼았다.
1946년 3월, 북한에서 무상 몰수·무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이 이뤄졌다는 소문을 들은 남한 농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거지처럼 살던 소작인 한 가구에 무려 4,500평이라는 땅이 생긴 북한 소작인들 입장에서는 천지개벽이 이뤄진 것이다. 아마도 남한의 소작인들은 당장이라도 38선을 넘어가 그 땅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한민당은 버티고 버티다가 1950년에 이르러, 하는 수 없이 유상 몰수·유상 분배라는 타협안을 들고 나왔다. 지주들이 갖고 있는 땅을 국가가 사서 소작인들에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자유 경제를 당연시하는 미 군정이 있는 한, 남한에서 무상 몰수·무상 분배라는 공산주의식 토지 개혁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유상 몰수·유상 분배는 무상 몰수·무상 분배보다는 훨씬 약하긴 하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이디어였다. 지주들 입장에서는 불만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이고, 소작인들 입장에서는 공짜가 아니라 섭섭하지만 그래도 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남한 정부는 토지에서 나는 생산량의 1.5배를 땅값으로 계산, 국가에서 5년 분할 상환 지가 증권을 지주에게 주고 토지를 사들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렇게 지주들의 땅을 사들여, 소작인 가구당 1천 평씩 잘라 팔아 주었다. 그 대신 소작인들에게는, 정부가 지주에게 갚아야 할 돈을 5년간 나눠 대신 내도록 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북한이 성공하고 남한이 그보다 못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친북 학자들은 북한은 소작인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눠 준 반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친일 지주들 입장을 대변하여 무상으로 빼앗지 않고, 그것을 사서 소작인들에게 팔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인연의 법칙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 저물어야 그 결실이 제대로 열렸는지 보여 준다. 장밋빛 정책이야 얼마든지 내걸 수 있지만,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그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모든 우주 법칙이 총동원되어 이 인연을 계산하고 이끌기 때문에, 개인의 생각대로 호락호락 되지 않는다.
1950년 4월 6일 남한은 유상 몰수·유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제 탱크 등 모든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남한의 소작인들은 평생 가져 보지 못한 자신들의 땅에 모를 심고, 감자를 심고, 고추를 심었다. 이런 소작농이 무려 180만 가구였으니 땅을 준 이승만에 대한 지지도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46년에 김일성이 북한 소작인들로부터 받은 환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열화 같은 지지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그 결과를 상상해 보자. 북한의 농민들은 무상으로 땅을 받은 대신 생산량의 30%를 영원히 국가에 바치는 방식이지만, 남한은 생산량의 30%를 5년만 갖다 내면 영원히 개인 소유가 되는 방식이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자 자기 땅을 갖게 된 남한 농민들은 이 토지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이 오판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만일 남한이 전쟁 이전에 토지 개혁을 이뤄 내지 못했다면, 북한군이 내려오기 무섭게 우리 농민들이 인민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해 아마도 우리는 김일성의 도발을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지주들이 땅을 그냥 다 빼앗겼지만, 남한의 지주들은 땅 판 돈으로 공장을 세우거나 산업 분야에 투자하는 등 자본가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무상 분배 4년 차에 이른 북한 농민들은 여전히 생산량의 30%를 국가에 바쳐야 하고, 이후로도 계속 내야 했다. 즉, 지주의 얼굴이 친일파나 양반 관료에서 공산당으로 바뀌었을 뿐, 그들의 처지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협동 농장 체제로 바뀐 뒤부터 내 땅이라는 개념마저 박탈당해, 북한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원인이 된다.
500년 사직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생국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역시 토지 개혁 하나로 ‘이(성계)밥’을 먹게 된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왕실을 단박에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우주는 합리적으로, 예외 없이, 한 치의 빈틈없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일성은 장님 문고리를 잡듯 대충 계산하다가 뜻밖의 화를 입었고, 민심에 버티다 마지못해 시늉만 한 이승만은 뜻밖의 행운을 잡은 것이다.
- 『1% 인연의 힘』 중에서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336쪽 / 14,800원)
남한의 농민들, 특히 소작인들은 북한의 이러한 소식을 듣고 공산주의라는 게 저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고 김일성의 북한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김일성이 ‘내려가기만 하면 남한 인민들이 다 환호할 것’이라고 믿은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남한은 지주, 재벌, 친일 고급 관료들이 모여 한민당을 결성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면서 통치 대리인을 두었는데, 이들이 바로 지주들이요 친일 고급 관료들이었다. 이러한 한민당의 정점에 이승만 세력이 있었고, 더 위에 군정이 있었다.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삼아 자신들의 방패와 방죽으로 삼았다.
1946년 3월, 북한에서 무상 몰수·무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이 이뤄졌다는 소문을 들은 남한 농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거지처럼 살던 소작인 한 가구에 무려 4,500평이라는 땅이 생긴 북한 소작인들 입장에서는 천지개벽이 이뤄진 것이다. 아마도 남한의 소작인들은 당장이라도 38선을 넘어가 그 땅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한민당은 버티고 버티다가 1950년에 이르러, 하는 수 없이 유상 몰수·유상 분배라는 타협안을 들고 나왔다. 지주들이 갖고 있는 땅을 국가가 사서 소작인들에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자유 경제를 당연시하는 미 군정이 있는 한, 남한에서 무상 몰수·무상 분배라는 공산주의식 토지 개혁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유상 몰수·유상 분배는 무상 몰수·무상 분배보다는 훨씬 약하긴 하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이디어였다. 지주들 입장에서는 불만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이고, 소작인들 입장에서는 공짜가 아니라 섭섭하지만 그래도 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남한 정부는 토지에서 나는 생산량의 1.5배를 땅값으로 계산, 국가에서 5년 분할 상환 지가 증권을 지주에게 주고 토지를 사들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렇게 지주들의 땅을 사들여, 소작인 가구당 1천 평씩 잘라 팔아 주었다. 그 대신 소작인들에게는, 정부가 지주에게 갚아야 할 돈을 5년간 나눠 대신 내도록 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북한이 성공하고 남한이 그보다 못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친북 학자들은 북한은 소작인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눠 준 반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친일 지주들 입장을 대변하여 무상으로 빼앗지 않고, 그것을 사서 소작인들에게 팔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인연의 법칙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 저물어야 그 결실이 제대로 열렸는지 보여 준다. 장밋빛 정책이야 얼마든지 내걸 수 있지만,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그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모든 우주 법칙이 총동원되어 이 인연을 계산하고 이끌기 때문에, 개인의 생각대로 호락호락 되지 않는다.
1950년 4월 6일 남한은 유상 몰수·유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제 탱크 등 모든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남한의 소작인들은 평생 가져 보지 못한 자신들의 땅에 모를 심고, 감자를 심고, 고추를 심었다. 이런 소작농이 무려 180만 가구였으니 땅을 준 이승만에 대한 지지도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46년에 김일성이 북한 소작인들로부터 받은 환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열화 같은 지지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그 결과를 상상해 보자. 북한의 농민들은 무상으로 땅을 받은 대신 생산량의 30%를 영원히 국가에 바치는 방식이지만, 남한은 생산량의 30%를 5년만 갖다 내면 영원히 개인 소유가 되는 방식이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자 자기 땅을 갖게 된 남한 농민들은 이 토지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이 오판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만일 남한이 전쟁 이전에 토지 개혁을 이뤄 내지 못했다면, 북한군이 내려오기 무섭게 우리 농민들이 인민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해 아마도 우리는 김일성의 도발을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지주들이 땅을 그냥 다 빼앗겼지만, 남한의 지주들은 땅 판 돈으로 공장을 세우거나 산업 분야에 투자하는 등 자본가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무상 분배 4년 차에 이른 북한 농민들은 여전히 생산량의 30%를 국가에 바쳐야 하고, 이후로도 계속 내야 했다. 즉, 지주의 얼굴이 친일파나 양반 관료에서 공산당으로 바뀌었을 뿐, 그들의 처지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협동 농장 체제로 바뀐 뒤부터 내 땅이라는 개념마저 박탈당해, 북한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원인이 된다.
500년 사직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생국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역시 토지 개혁 하나로 ‘이(성계)밥’을 먹게 된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왕실을 단박에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우주는 합리적으로, 예외 없이, 한 치의 빈틈없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일성은 장님 문고리를 잡듯 대충 계산하다가 뜻밖의 화를 입었고, 민심에 버티다 마지못해 시늉만 한 이승만은 뜻밖의 행운을 잡은 것이다.
- 『1% 인연의 힘』 중에서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336쪽 / 14,800원)